“인간은 거짓 없이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교수 입력 : 2019.02.01 10:24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 학부 교수(언론학 박사)
진실 게임

랴쇼몽(羅生門)이라는 꽤 오래된 영화가 있다. 일본의 유명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1950년 작품이다. 사무라이의 아내가 숲 속에서 도적에게 겁탈을 당하고 사무라이는 시체로 발견되는데 영화는 관련 인물들의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회상 장면으로 구성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반된 기억과 증언들로 인해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매우 토속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입장에 따라 구성되는 서로 다른 진실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솜씨 있게 다룸으로써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손꼽혀온 손석희 JTBC 대표가 폭행,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되었다. 이와 관련해 손 대표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사실과 주장은 엄연히 다르다"며 "사법당국에서 진실을 밝혀 주리라 기대한다" 고 말했다. 자신의 팬 카페 게시판에도 "긴 싸움을 시작할 것 같다"며 "모든 사실은 밝혀지리라 믿는다"는 글을 올렸다. 손 대표 의혹이 불거지기 바로 며칠 전에는 더불어 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손 의원 역시 기자회견에서,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그것이 진실의 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제기된 의혹과 언론 보도가 거짓이고, 결국 진실이 밝혀져 자신들의 결백함이 입증되리라는 주장이다.

“결국 진실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표현은 독재시대에 언론탄압에 맞서 싸우던 언론인과 민주투사들이 즐겨 사용하던 비장미 넘치는 슬로건이다. 그런데 이것이 근자에 들어서 비위 혐의로 위기에 처한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목적으로 사용하면서 일반 대중에게조차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상투적 표현이 되어버렸다. ‘진실의 궁극적 승리’와 같은 어떤 절대적 가치를 드러내는 표현은, 나와 같은 사회과학도들 역시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보통의 사회과학도들에게 진실은 거짓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유효한 잠정적이고 제한적이며, 또 상대적인 것이다.

제보, 폭로, 언론보도, 반박, 재반박, 고소, 고발, 수사, 재판으로 이어지는 이런 진실 게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이것이 게임인 것은 서로 다른 진실이 경쟁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그래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 논란이 되었던 기획재정부 신재민 사무관의 내부고발 문제나, 청와대 특검반원이었던 김태우 사건도 그렇고, 시간을 거슬러가면 최순실 사건이나, 다스 소유권을 둘러싼 이명박 전 대통령 문제도 이런 게임 양상을 띤다. 대개의 경우 진실게임은 법정에서 그 최종 승부를 가리게 된다. 물론 최근의 사법농단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적 판단 역시 절대적 진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

진실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이 진실이다.
사람마다 다른 진실을 가진다는 라쇼몽의 명제는 매우 현실적이다. 이 명제를 수용할 때, “진실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주장은 자신의 진실이 승리한다는 의미다. 강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빗대어 말하면, 진실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것이 진실이다. 나의 진실(혹은 거짓)을 다수의 진실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다. 손석희 대표가 “긴 싸움이 되리라”한 것도 손혜원 의원이 “반드시 이긴다”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반박에 재반박, 반전에 재반전이 거듭되고 결국 승리하는 자의 주장을 우리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진실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
진실의 모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란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라쇼몽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영화가 있다. 2011년에 베를린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이하 씨나별)라는 이란 영화다.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구로자와보다 한걸음 더 나간다. 진실은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때때로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모호하다. 아내 씨민과 별거 중인 중년 사내 나데르는 거동이 불편한 부친을 위해 여성 간병인을 고용하는데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친이 쓰러진다. 분개한 나데르와 간병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간병인은 떠밀려 계단에서 넘어진다. 임신 상태였던 간병인은 유산을 하게 되고 나데르는 기소된다. 쟁점은 나데르가 그녀의 임신을 알고도 밀쳤는지 인데 그게 분명치 않다. 출근 준비 중에 지나가는 말로 언뜻 들은 것도 같지만, 실랑이 당시에 그것을 떠올리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간병인에게도 진실은 모호하다. 나데르와의 실랑이가 있기 전날 교통사고가 있었고 이후 심상치 않은 복통을 느꼈다. 유산이 나데르에게 밀려 넘어져서인지 교통사고 때문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데르나 간병인이나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에게 조차 불분명한 진실임은 본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어렵고 두려울 뿐이다.

나데르와 간병인은 자신들의 증언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갈등과 두려움을 느끼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반대로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은 매우 확신에 찬 태도로 뻔뻔하게 자신만의 진실(아마도 거짓)을 말한다. 라쇼몽이 거짓의 경연장이라면, 씨나별에는 분명한 거짓이 없다. 모든 인간은 거짓말을 하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구로자와의 생각이다. 라쇼몽은 진실을 가리는 이런 자연스러운 거짓말에 관한 영화다. 이에 반해 파르하디는 진실과 거짓의 불분명한 경계와 그로 인한 소통의 어려움에 주목한다. 나데르와 간병인이 알고 있는 바를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나데르의 책임정도가 더 분명해지지 않는다. 모두 말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더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덜 말함에 따라 진실은 또 왜곡된다. 영화는 이렇게 말할수록 더 모호해지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진실과 소통의 딜레마
소통을 위해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딜레마다. 명확하고 간결하게 말해야 전달이 원활하고 소통이 가능한데, 명확하고 간결할수록 진실과는 멀어진다. 진실은 명확하기보다 본질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무엇인가의 생략이고 강조고 증폭이다. 누구나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화자가 인식하든, 아니든, 그 속에는 많은 생략과 과장과 편견과 거짓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진실 게임은 상대방의 그런 거짓을 입증해야 이기는 게임이다. 진실은 입증되지 않는다. 아쉬가르와 구로자와의 영화는 진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어려움과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원초적이고 또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연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실 게임에 혼란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두 영화를 꼭 볼 필요가 있다. 현실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행여 영화가 너무 재미없거나, 볼 시간이 없다면 대신 기억해두면 좋을 만한 구절 하나를 끝으로 소개한다.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문제는 인간은 거짓 없이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말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