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블로어(whistleblower)와 딥스테이트(deep state), 그리고 음모론

[이일환의 情(정보의 눈으로)•世(세상)•思(바라보기)]

청장정보연구원 이일환 원장 입력 : 2019.11.20 10:21
휘슬블로어(whistleblower)는 우리말로 하면 ‘공익제보자, 내부고발자’에 가깝다. 모든 국가의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은 옳고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으며 밀고 나간다. 소수의 엘리트 패거리들에게 권력이 집중됨과 동시에 그 권력의 행사도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반대적 견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봉쇄하려 한다. 특히 사회정의에 반한 일이거나, 일반인의 상식과 동떨어진 정책 등을 추진할 때는 그 봉쇄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모든 통제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인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2018년 하반기에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김태우 전 청와대 특명반원과 신재민 기재부 사무관이 그 좋은 사례이다. 

그런데 한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미국에서도 지난 10월 6일 메가톤급 휘슬블로어가 나타났다. 장본인은 다름 아닌 CIA 요원이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통화 당시 백악관에 배속됐던 CIA요원으로서, 양인 간의 통화가 있은 지 1주일쯤 익명으로 “통화내용에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한다”고 CIA 법률팀에 보고했다. 그러나 CIA 법률팀에서 은폐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폭로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Joe Biden,민주당)의 아들에 대한 부정 의혹 여부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메가톤급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미국 정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민주당 펠로시 하원의장은 트럼프에 대한 탄핵절차를 시작할 것임을 공표함으로써, 미국 정가는 물론 국제사회와 외교정책에까지 영향을 주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인 북미 비핵화 협상에도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벌써부터 대두되고 있다. ‘자기 과시형 협상가’이자 ‘외교를 개인적인 쇼’로 포장하는 트럼프의 행태에다가, 탄핵 국면까지 더해져 매사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성향인 트럼프가 ‘대선용 실적 만들기’를 위해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고 일부 핵시설을 해체함과 동시에 경제제재를 일정 부분 풀어주는 이른바 ‘배드 스몰딜(bad small deal)’ 형태로 봉합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 있는 대목은 트럼프가 ‘딥스테이트(deep state)’라는 용어를 끌어 들여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실정을 방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딥스테이트’는 원래 가치 있는 개념이다. 이집트나 파키스탄, 그리고 터키 같은 발전도상국들의 ‘그림자(shadowy) 엘리트’들이 정부기관이나 국방부서에서 민주적 규범에 어긋나는 정책을 실행하고자 할 때 제동을 거는 집단을 의미했다. 그래서 미국 정계나 학계에서는 투명사회이고 규칙을 준수하는 미국 사회에는 이 개념이 맞지 않다고 보고,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딥스테이트’를 부각하며 비난해도, 트럼프가 직면하는 정부 부처와의 갈등 등은 사악하고 비민주적인 ‘딥스테이트’ 때문이 아니라, 미국 연방정부의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으로 인한 것이라고 반박해왔다. 각종 정부기구들은 상당한 전문성을 바탕에 깔고 자율적으로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해왔다는 것이다. 동시에 정부기관 등의 ‘양심적 딥스테이트’들은 고위정책 결정자들의 나쁜 짓들을 경우에 따라 공론화기도 한다. 그러기에 트럼프는 집권 초기부터 이들을 잠재적이고도 위험한 적대세력으로 간주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딥스테이트’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개념화해, “통상 정책과 정치를 왜곡하고자 막후에서 활동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했다. 트럼프는 이 논리를 바탕으로 미국 민주당과 소위 가짜뉴스 언론팀(워싱턴 포스트, CNN 등), 그리고 ‘딥스테이트’들이 결탁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면서, 신뢰성 깎아내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트럼프 대선 캠프와 러시아 간 내통 의혹) 증거가 없다고 밝힌 뮬러 특검보고서를 거론하며, ‘딥스테이트’들이 2016년 대선결과를 뒤집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트위터에 “소위 간접 정보를 가진 첫 번째 내부고발자의 내 통화내용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며 “이제 또 다른 내부고발자가 딥스테이트에서 오고 있고, 역시 간접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사실 트럼프가 ‘딥스테이트’를 공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잠깐 기술한 것처럼 대통령에 처음 당선되어 통치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딥스테이트들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각종 정책이 반발에 부딪히면 자신을 ‘딥스테이트의 희생자’로 포장하면서, 각급 정부기관이나 조직 내에 잠복해 있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집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왔다. 트럼프의 내부폭로자에 대한 공격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는, 케케묵은 교범에 따른 행동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나아가 음모론으로까지 연결시킨다. 이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것이다. 탄핵추진과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한 조사를 “자신을 파괴하기 위한 딥스테이들의 음모”라고 규정 짓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 게이트 당시에는 “정보기관이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을 사보타지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유착을 공인했다”고 비난하는 등 ‘CIA 등 정보기관 음모설’을 제기하여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트럼프 우호인사들도 한몫 거든다. 론 존슨(Ron Johnson) 공화당 상원의원은 “자신은 FBI나 CIA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이 같은 언사는 국가안보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안보와 국가 정보에 대한 사안을 자신의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악용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정보 및 안보기관들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심어주고, 나아가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급기야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고 미국의 전직 정보관리들은 우려한다.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이 같은 독특한 위협은 깊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한숨 짓는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담론투쟁은 우리에게도 생각할 과제를 던져준다. 두 달 넘게 이 나라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온 ‘조국 사태’는 음모론이 활개치는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지난 10월 11일 느닷없이 튀어나온 ‘윤석열 검찰총장의 윤중천 별장 접대설’ 보도는 한국판 음모론의 한 사례이다. 윤 검찰총장을 찍어내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는 음모론이 그것이다. 

딥스테이트 또한 한국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전 운동권 출신 간부가 SNS를 통해 고백한 것을 보면, 운동권이란 특수집단 내부에 강력한 ‘딥스테이트’들이 존재(예를 들어 ‘Secret Union’)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제계도 이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니어재단>은 지난 2017년 10월 24일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한국경제학회 주관 세미나에서 “한국 경제에는 거대한 기득권 구조 때문에 자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정치권과 관료•재벌•대기업 노조 등 기득권 세력이 담합을 통해 만들어 낸 불공정거래와 갑질 때문에 혁신적인 기업이 새로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니어재단>은 ‘기득권의 고착화’와 ‘담합과 폐쇄성’을 한국경제 생태계의 주요 문제점으로 제시했다. 일찍이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제임스 버넘(James Burnham, 1905~1987)이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문제가 아니라, 전문성과 실력을 바탕으로 각계를 장악하여 영향력을 행사는 ‘경영을 장악한 계층(manageral class)’이 문제 된다”고 주장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이른바 한국판 딥스테이트들이다. 

딥스테이트•음모론 등과 같은 부정적 단어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근저에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가치를 뒤흔든 트럼프의 공(?)이 크다. ‘기억하기 쉽고 단순한 표어 같은 어구를 반복함으로써 자기 방식대로 현실을 재정의’하는 트럼프의 언어조작 방식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있다. ‘트럼프식 정치’가 전 세계를 오염시키면서 가짜뉴스는 더욱 확산되고, 혐오는 그에 편승해 자리를 잡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사색이니 성찰과 같은 단어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일환 청장정보연구원 원장

한양대 자문교수
정치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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