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김대중도서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관련 사료 공개

머니투데이 더리더 정민규 기자 입력 : 2020.05.14 23:25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관련 사료를 공개한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강탈하기 위하여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였다. 

신군부는 이 사건 조작을 위해서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한완상, 조성우, 이해동, 이해찬 등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상대로 가혹한 고문을 하였다.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김대중은 5월 17일에 연행되어 9월 17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김대중 구명운동의 영향으로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직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기까지 4개월여 동안 김대중은 사형수로 지내게 된다. 

이 번에 공개하는 사료는 이와 관련된 것이다.


1. 사료공개 1 : 김대중이 사형수 시절 친필로 작성한 옥중수필

김대중은 1980년 9월 17일부터 1981년 1월 23일까지 사형수로 있었는데, 1980년 11월 25일부터 1981년 1월 5일까지 14편의 옥중수필을 작성하게 된다. 

이번에 공개하는 자료는 기존에 많이 알려진 옥중서신과 다르다. 

김대중이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당시 사형수 시절 가족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총 5통이다.(이 사건 관련 옥중서신은 총 29통). 

그런데 옥중수필은 14편에 이르기 때문에 사형수 시절 김대중의 생각을 분석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

친필 옥중수필 중에서 이번에 공개하는 내용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전두환, 박정희 등 독재자들에 대한 용서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김대중이 1980년 9월 13일 최후진술에서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다’라고 했었다. 

이 내용은 구두로 한 것이었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료는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 시절 김대중이 친필로 직접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김대중은 과거청산에 있어 진실화해 모델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정치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청산 방식에 있어 두 가지 경로가 있는데 하나는 진실화해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모델이다. 

진실화해 모델과 정의 모델 모두 역사적 상처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서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경제적 배상 및 보상을 철저하게 하여 사회통합을 이룩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지향점이 같다. 

다만 진실화해 모델은 가해자에 대한 법적인 인적 청산보다는 화해와 용서를 통한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고 정의모델은 법적 차원에서의 인적 청산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한국은 과거청산에 있어 진실화해모델을 취하고 있는데, 김대중은 이 노선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김대중의 화해‧용서‧포용‧관용의 정치는 DJP연합을 통해 최초의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고, 이 땅에 진보와 보수,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의 연대와 연합을 가능하게 한 토대가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대중은 집권 이후 박정희의 가족과 측근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를 포함한 단 한 사람에게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위와 같은 화해와 통합 그리고 평화의 정신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의 냉전 해소와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를 통해 김대중은 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 유럽의 빌리 브란트와 함께 20세기 세계를 대표하는 화해‧공존‧평화의 정신을 실현시킨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200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공개하는 옥중수필은 사형수 시절 친필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김대중의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의 정신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 1980년 12월 3일

나는 나의 그리스챤으로서의 신앙(信仰)과 우리 역사(歷史)의 최대(最大) 오점(汚點)인 정치보복(政治報復)의 악폐(惡弊)를 내가 당(當)한 것으로 끝마쳐야겠다는 신념(信念)을 특히 76년(七六年)의 3·1민주구국선언사건(三一民主救國宣言事件)으로 투옥(投獄)된 후(後) 굳게 하며 그 이후(以後) 이에 일관(一貫)했다. 10·26 사태(十·二六事態) 이후(以後)는 계속해서 국민적(國民的) 화해(和解)와 단결(團結)을 제창해 왔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호소(呼訴)는 아무런 반응(反應)도 얻지 못하고 오늘의 운명(運命)에 이르렀다.

나는 박정권(朴政權) 18년(十八年) 동안 일관(一貫)해서 비폭력적(非暴力的) 방법(方法)에 의한 평화적(平和的) 정권교체(政權交替)를 국민(國民)의 성숙(成熟)된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했으며 특히 10·26(十·二六) 이후(以後)는 어떠한 성명(聲明)이나 연설(演說)에서도 이를 강조(强調)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란음모자(內亂陰謀者)로서 오늘의 처지(處地)에 서게 되었다.

나는 박정권(朴政權) 아래서 가장 가혹(苛酷)한 박해(迫害)를 받은 사람이지만 나에 대(對)한 납치범(拉致犯), 자동차사고(自動車事故) 위장(僞裝)에 의한 암살음모자(暗殺陰謀者)들, 기타(其他) 모든 악(惡)을 행(行)한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容恕)의 뜻에 따라 일체(一切) 용서(容恕)할 것을 선언(宣言)했다.

나는 지금 나를 이러한 지경(地境)에 둔 모든 사람에 대(對)해서도 어떠한 증오(憎惡)나 보복심(報復心)을 갖지 않으며 이를 하느님 앞에 조석(朝夕)으로 다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時間)까지 나의 반대자(反對者)들로부터 무서운 증오(憎惡)와 모욕(侮辱)과 보복(報復)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결(決)코 실망(失望)하지 않는다. 하느님만은 진실(眞實)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의 행적(行蹟)대로 심판(審判)하실 것이고 우리 국민(國民)도 어느땐가 진실(眞實)을 알 것이며 역사(歷史)의 바른 기록(記錄)은 누구도 이를 막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다면 내가 지금 어떻게 마음의 평화(平和)를 유지(維持)할 수 있겠는가? 국민(國民)과 역사(歷史)에 대한 신뢰(信賴)가 없다면 나의 일생(一生)은 완전(完全)한 실패작(失敗作)이었다는 간탄(艱嘆) 이외(以外)에 나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겠는가?


2. 사료공개 2 : 문익환 목사 아들 문의근, 문성근이 작성한 김대중, 문익환, 이해찬 등 민주인사들의 1심 재판 최후 진술문

김대중 등 사건 관계자들은 1980년 7월 31일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되었고 8월 14일 첫 공판을 시작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9월 11일 김대중은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았고 문익환, 이문영, 조성우 등은 징역 20년형을 구형받았다. 

9월 12일 제17회 공판에서 김대중을 제외한 문익환 등 23명 민주인사들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9월 13일 18회 공판에서 1시간 45분여 동안 최후진술을 하였다.

당시 공판정에는 녹음기나 필기도구 등을 들고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방청석에 있던 가족들이 민주 인사들의 진술 내용을 외웠고 재판이 끝난 후 함께 모여 기억을 되살리면서 진술한 내용을 글로 작성했다. 

당시 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의근, 문성근이 주로 글을 작성했으며 김대중의 최후진술문은 문성근이 작성한 것이다. 

문성근은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서 한 줄이라도 더 외우기 위해서 혼신을 다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사료는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당시 엄혹한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주 인사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jmg1905@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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