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내모는 ‘까대기’ 명시 없는 반쪽법

[법으로 보는 세상]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 책임소재 불명확해 아쉬움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입력 : 2021.06.04 09:59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월 8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 노동자 과로사 추정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 재발방지대책 마련 등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뉴시스
#2020년 10월 12일 대구 수성구에 사는 택배 노동자 장모씨(27)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장씨는 칠곡 쿠팡물류센터에서 야간 택배 분류노동과 택배 포장 지원 업무를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대책위와 노동계는 이날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숨진 청년 노동자가 일한 곳은 물류센터 중에서도 가장 노동 강도가 심한 곳”이라며 “코로나19 사태 이후 물량이 대폭 늘어 작업량이 급격히 늘었는데도 인력충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20년 12월 23일 오전 9시쯤 롯데택배 소속 택배기사 A씨(34)가 화성시 소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이날 제공한 A씨와 동료가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면 고인은 하루에 300개까지 물량을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택배 노조 측과 유가족은 A씨가 하루 14시간씩 근무했고, 하루에 많게는 380개의 물량을 배송했다며 과로사라고 주장했다.

전날 과로에 시달리던 택배 노동자가 사망하면서 2020년 한 해에만 16명의 택배 노동자들이 숨졌다.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인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은 2020년 12월 24일 비로소 국회 교통위원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 1월 10일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앞으로 택배서비스사업자에는 등록제가, 배달대행·퀵서비스 등 소화물배송업에는 인증제가 도입된다. 국토교통부는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이하 생활물류서비스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제정안을 지난달 21일 입법예고했다.

이번 시행령·시행규칙 제정안에 대한 입법예고 기간은 이달 30일까지이며, 오는 7월 27일부터 시행되는 생활물류서비스법이 위임한 세부 내용을 마련한 것이다. 그동안 문제가 됐던 생활물류 발전방안과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등의 내용이 담겼다.

1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383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안이 가결되고 있다./사진=뉴스1

택배업에 등록제, 소화물배송업에 인증제 도입

앞으로 택배사업자 등록을 위해서는 법인 자본금을 8억원 이상(개인 자산가액 12억원)을 갖춰야 하며, 표준계약서를 참고한 위탁계약서를 작성·활용해야 한다.

또한, 5개 이상 시·도에 30개 이상 영업점을 확보하고, 화물분류시설을 3곳 이상(3000㎡ 이상 시설 1곳 이상) 갖춰야 한다. 이 밖에도 화물취급소와 전산망 시설, 택배 운송 허가 차량을 100대 이상 확보하도록 시설과 장비 요건이 마련됐다.

배달대행·퀵서비스 등 소화물배송업은 현재와 같이 자유업을 기반으로 하되, 우수사업자를 대상으로 인증제가 도입된다. 인증 사업자는 행정·재정적으로 우선지원 대상이 되며 소화물배송 공제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소화물배송업 인증 기준은 △안전하고 신뢰성 있는 서비스 제공을 위한 품질관리체계 △종사자 보호를 위한 사업 운영체계 △사업의 안전성·지속성 확보를 위한 경영 능력 등이다.

국토부는 인증제 시행을 위한 세부 사항은 올해 하반기 국토부 장관 고시로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택배업 종사자 권리와 안전도 강화한다

전국택배연대노조와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 회원들이 2020년 12월 23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글로벌로지스 본사 앞에서 롯데택배 택배노동자 사망사고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택배사에 대한 규탄과 과로사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사진=뉴스1
택배사업자와 종사자 간 안정적 계약을 위해 택배 종사자에게 운송 위탁계약 갱신 청구권을 6년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종사자가 화물운송사업 허가가 정지·취소됐거나 종사자격을 위반해 처분을 받은 경우 등 계약을 유지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계약 갱신이 가능하다.

그간 택배노동자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고용부나 산업안전보건법 상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종사자 안전 강화를 위해 택배사업자와 영업점을 대상으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안전·보건조치 이행실적과 계획을 점검하도록 했다.

만약 영업점의 안전·보건조치가 산업안전보건법 등 관계 법률을 위반할 경우 사업자가 영업점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도록 했다.

또한 사업자는 종사자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휴식시간을 주고 휴식공간(휴게실)을 갖춰야만 한다. 혹서, 혹한, 폭우, 폭설 등의 기상악화로 인해 종사자의 활동이 어려운 경우에 대한 안전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소화물배송 종사자의 유상운송 보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소화물배송 공제조합 설립 근거 역시 제정안에 담겼다.

표준계약서 통해 불공정 관행도 개선

이번 제정안은 사업자(영업점)-종사자 간 공정한 계약관계 유도를 위해서 표준계약서에 위탁업무 범위 및 수수료, 불공정 거래행위 금지 등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도록 했다. 또한 부당한 이익 수취·제공 유형을 구체화했다.

△화주가 사업자, 영업점 등으로부터 계약체결 등을 목적으로 제공되는 경제적 이익을 수취하는 행위 △사업자, 영업점 등이 경쟁사의 고객을 자기와 거래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소비자로부터 받은 금액을 화주에게 되돌려주는 행위 △화주가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소비자로부터 받은 생활물류서비스 대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수취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함께 생활 물류 서비스산업 거래구조 개선, 소비자·종사자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경우 국토부 장관이 생활물류서비스 사업자에게 개선명령 또는 권고를 할 수 있도록 근거가 마련됐다.

이 밖에도 생활물류서비스산업 발전 정책 수립 등에 쓰일 통계 작성을 위해 생활물류시설과 종사자 현황 등 실태를 국토부 등 당국이 매년 정기 조사를 실시한다는 내용도 이번 법에 명시됐다.

설 명절을 사흘 앞둔 2월 9일 오전 서울 송파구 복합물류센터에서 택배 노동자들이 분류작업을 있다./사진=뉴시스

택배산업 육성에 정부와 지자체도 나서야

국가와 지자체가 생활물류시설 건설 등의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도시개발 사업이 시행되는 경우에는 관할 지자체장은 물류시설 확충 계획을 도시계획 및 지역물류기본계획에 반영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는 도심 배송거점 등에 생활물류시설 용지를 사전에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국토부는 생활물류서비스 산업을 육성·지원하기 위해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생활물류서비스 산업 발전 정책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산업 육성, 연구개발 촉진, 시설·장비 확충, 고용·창업 활성화 등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다.

‘까대기’는 여전히 택배기사 몫?

일명 ‘까대기’라고 불리는 택배 분류작업은 택배기사들이 과로사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업무다. 2000년대 초반까지 물량이 많지 않아 작업시간이 길지 않았던 까대기는 택배수요가 급증하면서 5~6시간이 걸려 택배기사들의 부담이 가중돼왔다.

1월 29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복합물류센터에서 택배 상자가 가득 쌓여 있다./사진=뉴시스
택배기사들은 분류작업을 택배기사 업무에서 완전히 제외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번 생활물류서비스법에 까대기 책임소재는 명확히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생활물류서비스법 원안에는 택배기사의 업무 범위에서 분류작업을 명확히 제외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수정안에서 빠졌다.

수정안에 ‘택배서비스 종사자’를 ‘화물의 집화, 배송 등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분류작업이 제외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집화, 배송 등’에서 ‘등’에 분류작업이 포함된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국토부는 “분류작업은 택배회사 업무라는게 정부 입장이지만 사업자 측에선 원가상승에 따른 택배가격 인상 논의가 전제돼야 분류작업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라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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