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넣은 글감, 따로 놀지 않나

‘진행자’로서 글감을 소개해야 ‘대화하듯 쓴 글’ 된다

글쟁이(주) 백우진 대표 입력 : 2023.01.10 10:27
편집자주많은 리더가 말하기도 어렵지만, 글쓰기는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고난도 소통 수단인 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 리더가 글을 통해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노하우를 구체적인 지침과 적절한 사례로 공유한다.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와 <일하는 문장들> 등 글쓰기 책을 쓴 백우진 글쟁이주식회사 대표가 연재한다. <편집자주>
▲백우진 글쟁이㈜ 대표
글을 읽다 보면 ‘진행자 멘트’를 자주 마주친다.
가장 간단한 예로, 일반화를 제시한 다음 그것을 사례로 뒷받침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런 경우 필자는 ‘진행자’로서 ‘예를 들면’이라는 구절로 문장을 시작한다.

진행자 멘트는 안내 문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주요 구성 항목과 그 비중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보자’는 문장도 안내 역할을 한다. 안내 문장은 목차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안내 문장을 의문문 형식으로 표현하는 기법도 자주 활용된다. 위 안내 문장을 ‘주요 구성 항목은 무엇이고, 그 비중은 어떻게 변해왔을까?’라고 쓸 수 있다. 의문문 형식 안내 문장은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효과가 있다.
글을 읽다 보면 가끔 안내 문장이 들어갔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띈다. 그런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두 이 문장 또한 안내 문장이다.)

‘대화하듯 쓰라’는 조언의 구체 지침
다음은 내가 쓴 글의 앞 부분이다. 굵은 글자로 표시한 부분이 안내 문단이다.

#1. 등장인물 길옥윤(吉屋潤).
작곡가. ‘빛과 그림자’ ‘이별’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등을 지었다. 패티김, 혜은이 등 가수가 그의 노래를 불러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1927년 평안북도 영변 출생. 본명은 최치정(崔致禎). 평양 종로국민학교과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전신인 치과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치과대학 선배인 김영순이 조직한 악단에 가입해 활동한 뒤 1950년에 일본 도쿄로 가서 재즈 음악과 색소폰 연주를 본격 배웠다. 

1952년 악단을 조직해 주일 미군부대를 순회하면서 공연했다. 당시 예명이 요시야 준(吉屋潤)이었다. 이 일본식 예명을 1960년 귀국 이후에도 활용했다. 일본에서는 ‘요시야’가 성이었지만 한국에서는 ‘길’이 성이 됐다. 1960년대에 ‘서울의 찬가’ ‘빛과 그림자’ 등을 작곡했고 1970년대에 ‘이별’ ‘사랑은 영원히’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등을 발표했다. 1995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 등장인물 마쓰우라 모토오(松浦 元南).
일본 사업가. 주켄공업(樹硏工業)을 창업해, 카메라와 시계, 자동차, 의료기기 등에 들어가는 초소형 톱니바퀴나 나사 등 플라스틱 부품 분야의 세계 최고 기업으로 키워냈다. 1935년 나고야 출생.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고 재학 중에는 미장공, 인쇄공, 제빵사 등으로 일했다. 아르바이트 중 재즈 밴드 활동에서 가장 즐거움을 느꼈다. 아이치대 법경학부에 입학하고 나서도 밴드 생활을 이어갔다. 졸업 후 화학회사에서 3년간 경험을 쌓은 뒤 1965년 개인 사업체로 주켄공업을 창업했다. 

구성원들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도록 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고 운영해 더욱 주목받았다. 주켄공업은 출퇴근이 자유다. 개발은 누구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며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한다. 정년도 없다.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하는 기업 문화 속에서 오히려 내로라하는 장인이 속속 배출됐다.

한국인 작곡가와 일본인 사업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노력’과 ‘결실’을 주제로 한 글의 서두에 올린 이유가 궁금하시리라. 둘에게는 남다른 노력으로 음악계와 사업계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보다 나는 마쓰우라 모토오가 길옥윤으로부터 받은 큰 가르침을 공유하고자 한다. 두 사람 소개는 그에 앞서 필요한 기본 정보 제공 측면에서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50년대 초에 이어진다. 당시 길옥윤은 일본 제일의 색소폰 연주자로 명성을 날렸다. 길옥윤은 지인으로부터 트롬본을 연주하는 10대 청년을 추천받아 오디션 없이 자신의 재즈 밴드에 받아들인다. 그 청년이 마쓰우라 모토오다. 그는 어느 날 길옥윤으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자네, 재즈 곡을 몇 곡이나 외우고 있나?”
“300곡 정도는 연주할 수 있습니다.”

길옥윤은 “마음을 담아서 연주할 수 없다면 외웠다고 할 수 없네”라며 말한다. “자네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나? 한 사람의 마음에 말을 걸어본 적이 있냐는 말일세.”
이어 그는 본론을 꺼낸다. (하략)

이제 상자에 담긴 사례를 살펴보자. 왼쪽이 주 재료와 감 두 건이고, 오른쪽이 진행자 발언을 추가해 완성한 글이다. 진행자 발언은 굵은 글자로 표시됐다. 종합한 오른쪽 글은 주 재료도 글감에 맞춰 대폭 수정했다.

‘독자와 대화하듯 쓰라’는 조언이 있다. 이 조언을 구체화하면, 글을 쓰는 당신은 독자에게 사회자, 또는 진행자, 또는 안내자이어야 한다. 하고많은 재료 가운데 왜 이 글감을 가져왔는지, 이 글감은 글의 흐름에서 어떤 기능을 맡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 역할을 독자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파악하도록 하지 말자. 사회자 역할을 잊지 말자.


[주 재료] 철학이론으로서 경험론은 이미 고대철학의 역사 속에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이 경향이 유력해진 것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경험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영국은 경험론의 전통에 있어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띤다. 이 경향은 중세에 이미 프랜시스 베이컨, 오컴 등에서 뚜렷하였으며, 특히 후자의 비판적 견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영국 경험론의 진정한 기원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고, 연역적 추리에 대하여 개별적 경험에 근거를 두는 귀납법을 제창한 베이컨이다.
이 경향은 토머스 홉스를 거쳐 존 로크에 이르러 르네 데카르트의 생득관념설을 비판하여 모든 인식의 경험에 의해 설명됨으로써 명확화하였다. 로크는 “마음이란 백지 또는 암실이며,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하여 외적으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라고 하였다.

[글감1] 실증주의자들은 먼저 사실들을 알아내고 그것들에서 결론을 도출하라고 말했다. 이 역사관은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과 완벽히 들어맞았다. 경험주의는 로크부터 버트런드 러셀에 이르기까지 영국 철학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왔다. 영국 역사가들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끌리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그들은 역사의 의미가 암묵적인 동시에 자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사실들 자체는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사실의 표현으로서, 높은 역사 인식을 향한 접근에 유익하며 분명 무한히 진행된다고 영국 역사학자들은 생각했다.

[글감2]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 이후 급진적인 과학적인 사고가 거침없이 펼쳐졌다. 다윈에 앞서 라마르크가 주창한 진화론이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영국의 지질학자와 고생물학자들은 여전히 실용주의(경험론)에 머물렀다. 그들은 이를테면 "큰 아이디어 속에서 자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머리를 싸매는 대신 그저 자료를 수집해나가자"고 말했다.

[종합] 영국은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의 관념론과는 대조적인 경험론을 발달시켰다.
이 경향은 중세에 이미 프랜시스 베이컨, 오컴 등에서 뚜렷했고, 베이컨에 의해 이론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고, 연역적 추리에 대하여 개별적 경험에 근거를 두는 귀납법을 제창했다. 이후 존 로크는 데카르트의 생득관념설에 맞서 모든 인식은 경험에 의해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마음이란 백지 또는 암실이며,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하여 외적으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라고 말했다. [글감1]의 일부 이런 철학적 전통은 버트런드 러셀에까지 이어졌다.
(안내 문장) 영국의 경험론 전통은 역사학과 생물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글감1] 역사학의 실증주의는 경험론과 잘 어울렸고 영국에서 세력을 얻었다. 영국의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먼저 사실들을 알아내고 그것들에서 결론을 도출하라고 말했다. 영국 역사가들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끌리기를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의 의미가 암묵적인 동시에 자명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사실들 자체는 최고 지위를 차지하는 사실의 표현으로서, 높은 역사 인식을 향한 접근에 유익하며 분명 무한히 진행된다고 영국 역사학자들은 생각했다.
(안내 문장) 이 같은 경향은 진화론에 대한 대응에서도 확인되었다.

[글감2] 프랑스에서는 1789년 혁명 이후 급진적인 과학적인 사고가 거침없이 펼쳐졌다. 다윈에 앞서 라마르크가 주창한 진화론이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영국의 지질학자와 고생물학자들은 여전히 실용주의(경험론)에 머물렀다. 그들은 이를테면 “큰 아이디어 속에서 자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머리를 싸매는 대신 그저 자료를 수집해나가자”고 말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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