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청산 못한 인감증명서의 진실

[김동하의 컬처 리포트]‘일본식 행정’ 잔재…IT 최강국 기술로 ‘대면의 장벽’ 깨야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김동하 교수 입력 : 2020.10.06 09:26
▲김동하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1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한창인 여름. 한 중년의 일본 여성이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 홀로 출근해 업무를 보는 이 여성의 주된 업무는 도장 찍기다. 보안문제로 결재용 인감을 회사 밖으로 가져갈 수 없어, 최소 주 1회는 홀로 도장을 찍으러 출근한다고 한다. 

회사마다 도장만 찍으러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멘트도 나온다. 우리가 ‘디지털 후진국’이자 ‘도장천국’이라 비꼬는 일본의 방송 다큐멘터리 속 모습이다. 

#2 초기창업패키지 비대면 스타트업 사업에 지원한 초기 창업자 A씨. 직원 세 명은 모두 재택근무 중이지만 홀로 출근해 법원 내 등기소로 향한다. 은행에서 담보대출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법인인감증명서를 떼기 위해서다. 동네 유일한 무인발급기를 찾은 그는 오랜만에 1만원짜리 지폐를 1000원짜리로 바꿔 투입한다. 

필요한 건 한 통이지만 넉넉하게 3000원을 넣고 3통을 뽑는다. 그러곤 개인인감증명서를 떼러 주민센터로 향한다. 대면 창구에서만 가능한 일이라 번호표를 뽑고 직원의 지시에 따라 지문을 찍고 돈을 낸다. 역시 필요한 건 한 통이지만, 넉넉하게 3통을 뽑는다. 유효기간은 3개월이지만, 부족해서 다시 떼러 오는 것보다는 남으면 버리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비대면 ‘언택트’사업으로 혁신창업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IT강국 한국의 어떤 일상이다.

인감증명서는 자기가 쓰는 인감도장이 확실한 자기 것임을 공적으로 증명해주는 문서다. 매매, 등기, 대출 등을 실행할 때 본인의 의사표시로 찍는 인감도장이 내 것이라 신고했던 기존 것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은행이나 공공기관에 가면, 본인이 본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단계가 있다. 신분증을 들고 본인이 직접 서명을 하더라도, 인감도장이 없으면 소용없을 때가 있다. 본인이 신분증과 인감도장을 직접 들고 가도 인감증명서가 없으면 소용이 없고, 인감증명서가 있어도 뽑은 지 3개월이 지나면 소용이 없다. 

법인 담보대출이나 등기의 경우, 대표자가 직접 신분증과 개인인감, 법인인감을 들고 가도 3개월 이내 각각의 증명서가 없으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 도장이 본인 것임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건 본인과 도장보다 한 장의 서류란 말인가. 은행이 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건, 그들의 보안과 신뢰를 높이는 행위일까, 아니면 감독당국의 요구에 따른 요식적 행위일까.

일본식(式) 행정 잔재…디지털 강국의 이면
‘전자정부’라 불리는 한국정부의 ‘디지털화’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민원24 등 온라인을 통해 주민등록등·초본은 물론이고 등기부등본 등 각종 증명서도 원격으로 어디서나 발급받을 수 있다. 얼마 전부터 국세청에서는 사업자등록증도 인터넷으로 뽑을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관문은 인감증명서에서 막힌다. 더욱이 개인인감증명서의 경우 좀 더 값싸게 발행할 수 있던 무인기도 사라졌고, 어느새 창구에서 직접 떼야 하는 시절로 돌아갔다. 

인감(인감(印鑑))제도는 대표적인 일본식 행정의 잔재로 꼽힌다. 전 세계적으로 인감을 등록해 활용토록 하는 곳은 일본과 한국, 대만 정도뿐이다. 더욱이 유효기간 3개월은 법률상 존재하는 요건도 아니다. 인감증명서를 활용토록 하는 ‘집행기관’ 또는 ‘감독기관’ 즉 공권력의 집행단계에서 관행적으로 요구하는 요건에 가깝다.
그렇다면 인감증명서는 보안과 거래의 신뢰를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 반대로 인감증명서가 정말 보안과 신뢰의 기능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세계 최고 수준의 신분증…
사회 신뢰성의 척도?
한국의 주민등록증은 전 세계 어느 신분증보다 높은 정확성과 정보를 자랑한다. 주요국 어느 나라에도 사진, 지문, 개인별 번호가 모두 공개된 신분증은 거의 없다. 공공의 높은 신뢰성이라는 긍정적 시각과,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부정적 시각이 공존하는 이유기도 하다.

특히 일본은 공식적 신분증 자체가 없고, 2016년부터 희망자에 한해 도입한 ‘마이 넘버’라는 내국인 신분증도 보급률은 20%에 크게 못 미친다. 본인이 본인임을 확인하는 데 애를 많이 먹는 사회 시스템 탓에, 어찌 보면 인감도장이 일상화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감증명서의 경우에도 한국처럼 중앙 등기소에서 통합적으로 등록관리하는 형태가 아니라 주소지 관할 지방정부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형태에 가깝다. 때문에 일본은 은행에서 통장 하나 개설하는데도 아직도 많은 도장 날인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이런 일본에서도 원격근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며 ‘탈도장’ 움직임이 한창이라고 한다. 

이처럼 본인이 본인임을 증명하는 과정의 복잡성은 간접적으로 그 사회의 신뢰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저개발국일수록 행정이 복잡한 건 잘 알려진 사실, 행정처리 속도가 늘어지기로 악명 높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등기나 대출을 할 때 인감증명서 같은 절차는 없다. 

미국 은행에서 모기지 대출을 받을 때 필요한 서류는 세금보고서, 운전면허증, 소득증명이다. 인감증명서는 물론 공인인증서도 없고, 도장 없이 서명으로 모든 확인과 결재는 끝이 난다. 물론 금융 사기나 사고 확률이 우리보다 높을 수는 있겠지만, 그 확률을 낮추기 위해 드는 불편과 비용이 더 크기 때문인지 굳이 인증서를 도입하지는 않고 있다.

한국은 일찌감치 전자결제 등으로 탈도장이 이뤄진 지 오래고, 공인인증서도 폐지한 디지털 선진국이다. 담보대출을 제외하고 시중은행에서 개인인감증명서를 요구하는 일도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등기나 담보설정 등의 과정에 있어서 인감증명서는 버젓이 남아 큰 기업 말단 직원들, 또는 작은 기업 대표자들의 시간과 비용을, 지폐 또는 지문과의 ‘대면’을 요구하고 있다.

비대면 ‘언택트’시대의 대면 인감증명…
버려지는 ‘비용’ 지적도

인감증명서는 각종 소송과 분쟁에서 계약의 효력을 입증하는 확실한 공증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도장 찍고 서명하는 개인이 공공기관, 또는 은행과 계약의 효력을 놓고 분쟁을 벌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신분증 제도와 보안기술을 활용하는 한국에서 말이다.

유효기간 3개월로 버려지는 인감증명서들의 사회적 비용은 얼마나 될까. 또 정부가 인감증명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실상 인감증명서 직접 떼러 다녀본 적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불편을 못 느끼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인감증명서와 유효기간의 비용과 효과에 관한 공론화도, 연구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의 IT기술은 신분증 외 추가적 증명과 보안에 있어서도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인 해법을 만들 능력을 갖추고 있다. 국내외 기업들이 이미 널리 활용 중인 CCTV, 블록체인, 홍채 등을 활용한 생체인식, 바이오 인증 등의 ‘언택트’ 기술이 대표적인 예다. 

코로나19로 아무리 세상이 느려져도, 인감증명서의 유효기간은 돌아온다. 분명한 건 반드시 주민센터 대면 창구에 가서 엄지손가락으로 지문을 찍어야 하는 상황은, 비대면 언택트 혁신창업을 독려하는 요즘 트렌드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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