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민주주의와 국회의 예산심사제도 개혁

[김승기의 the 여의도]

전 국회 사무처 김승기 사무차장 입력 : 2021.04.06 14:24
▲김승기 전) 국회 사무차장/경제학박사
요즘처럼 재정 문제가 언론에서 각광받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작년에 4차례에 걸친 추경을 한 데 이어 올해도 본예산이 제대로 집행되기도 전에 추경 이야기가 나오더니 급기야 3월 4일 제1회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작년이나 올해나 추경안의 주요 내용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난지원금 관련인데 이는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또 세출소요에 충당할 세수가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데 이는 미래세대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당연히 전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재난지원금예산 총액을 어느 정도 규모로 책정할 것인지, 세수부족 충당을 위한 국채발행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이며 나아가 향후 국가채무비율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것인지, 지원금은 전 국민 보편지원으로 할 것인지 선별지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섞어서 조합방안을 마련할 것인지 등등 경제적 분석과 국민의 선호를 반영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문제는 여야 간에도 의견대립이 있지만 정부여당 내에서도 기획재정부의 입장 등 의견통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며 사실 국민 개개인의 의견도 백인백색일 가능성이 높다. 의견조율이 정말 힘든 과제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라고 고비용을 들여 국회가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 국가재정 문제는 일부 이해관계자를 제외하고 일반 국민은 관심을 갖기가 어려웠다. 우선 재정체계가 대단히 복잡하고 예결산 절차도 그에 못지않으며 예결산서는 숫자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난지원금으로 전 국민이 재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재난지원금으로 자신의 가계가 도움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함과 동시에 이 돈이 나의 세금에서 나왔거나 내 자식이 앞으로 갚아야 할 부담임을 깨닫는 것은 지속가능한 재정, 즉 국가의 존속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재정 문제는 민주주의 구현과정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였다.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기원이 된 1215년의 대헌장(Magna Carta)은 당시 존 왕(John Lackland)이 잦은 전쟁비용 충당을 위해 세금을 중과한 데 대한 귀족들의 반기에서 비롯됐다. 대헌장 제12조는 왕국의 평의회(The common council)에 의하지 않고는 왕국 내에서 어떠한 국역대납금 또는 공과금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여 근대적 의미에서 조세법률주의를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영국은 징수된 세금의 용도에 대해서도 점차 의회가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법률의 형식으로 예산을 편성 집행하는 예산법률주의 제도를 확립해나간다.

프랑스의 경우도 7년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 등으로 재정이 파탄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삼부회의가 소집되고 이것이 결국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혁명 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4조에서 모든 시민은 자신 또는 그의 대표자에 의해 조세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자유로이 승인한 조세에 대해 그 용도를 감시하고 그 분담액 과세기준 징수기간을 결정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여 조세법률주의를 규정했다.

미국의 경우도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영국이 설탕조례 인지조례 타운젠트 관세조례 등 세금을 자의적으로 중과해오고 있던 중 보스턴 차사건 등을 통해 반발하면서 1776년 버지니아 권리장전에서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슬로건을 걸고 독립혁명을 전개해 1787년 헌법에서 조세법률주의와 예산법률주의를 명기했다.

이제 많은 국민이 재정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우리나라에 있어 국민의 의사에 의한 재정 문제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재정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재정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세법률주의는 우리나라도 제헌헌법에서부터 도입돼 있다. 

다만, 선진국에서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예산법률주의는 아직 도입돼 있지 않다. 물론 예산을 법률과 다른 형식으로 취급하는 예산비법률주의가 재정민주주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장단점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국회에서도 많은 연구와 제안이 있었는데 2009년과 2014년에 국회의장 자문기구로 출범한 헌법연구 자문위원회가 예산법률주의의 도입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바 있고, 2016년 12월 구성된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에서도 2018년 1월 특위에의 보고서 제출을 통해 예산법률주의 도입을 제안했다. 또한 대통령이 2018년 3월 26일 발의하여 국회에 제출한 헌법개정안도 기본적으로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까지 제출한 예산안을 국회에서 심의하여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법률안을 의결함으로써 예산안을 확정하도록 하고 있다.
예산법률주의 도입 문제가 개헌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이와 관계없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현행 예산심의제도를 개선함으로써 좀 더 재정민주주의 취지에 맞게 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현행 제도도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국회가 심의 의결한다는 점에서는 재정민주주의적 방식이 틀림없지만 지금 제도로는 재정의 전체적 흐름을 국회가, 국민이 명확히 인식하고 결정한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국회의 예산안 심의는 개별 상임위원회의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심사라는 2단계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정부 부처별 세부사업을 중복 심사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하다. 정부가 편성해온 예산안상의 재정규모, 국채발행, 조세부담률, 분야별 재원배분 등에 대해 치열한 논의를 통해 재편하려는 의지와 제도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2000년대 초반에 행정부는 총액배분 자율편성이라는 하향식(top-down) 예산편성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중장기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먼저 수립하고 이에 따라 중앙예산당국인 기획재정부가 매년 예산안편성지침을 작성하면서 거시적 재정총량 내에서 분야별, 부처별 지출 한도를 정하면 각 부처는 정해진 지출 한도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제도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세부 사업의 우선순위와 규모도 예산 당국의 손에 좌지우지되겠지만 예산편성의 기본적인 전략적 틀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재정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국회에서도 이러한 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난지원금 지급과 재정건전성 논란을 겪으면서 재정 문제가 개인 생활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을 국민들이 가지는 이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재난지원금을 비롯한 복지 수준과 국가부채, 조세부담률 등의 재정 문제가 패키지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국회도 행정부 예산편성 방식에 대응해 하향식 예산심의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우선 행정부에서 중장기 국가재정운용계획과 이에 따른 예산안편성지침이 작성되면 그 시점에 국회에 보고되고 재정총량과 재원배분에 관한 사항들이 국회(예결위)에서 논의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큰 틀에서의 재정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가을에 세부사업을 포함한 정식 예산안이 제출되면 국회에서 현행처럼 세부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예산심사를 진행하면 된다. 이러한 사전예산검토를 포함한 2단계 예산심사제도는 1990년대 재정위기가 심하던 영국, 스웨덴 등에서 도입해 큰 효과를 본 바 있다.

우리나라도 조금만 제도 개선을 하면 2단계 예산심사제도를 시행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행 국가재정법에 따라 중장기 국가재정운용계획과 예산안편성지침을 모두 국회에 제출 보고하도록 돼 있으나 그 시기가 가을과 봄으로 서로 다르다. 또한 봄에 제출하는 예산안편성지침에는 총지출 한도 및 부처별 지출 한도 등 거시적 재정 문제를 논의할 핵심적 재정 정보가 제외돼 있다. 이러한 점만 보완되면 충분히 2단계 예산심사제도를 운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정확대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는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 진행과 복지 확장, 주기적 금융위기 대비, 통일 대비 등을 위해 지속가능한 재정 대책이 중요한 정책과제다. 정책 당국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이를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재정총량과 재원배분 문제를 다루는 국회에서의 제1단계 사전예산검토는 재정민주주의 제고를 위한 공론의 장이 될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국 University of Oregon 경제학박사
(현)국회예산정책처자문위원
(전)국회 사무차장
국회운영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국회국토교통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국회보건복지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국회 정무위, 기획재정위, 보건복지위 전문위원
국회사무처 국제국장, 의정연수원장
주제네바대표부 입법관(공사참사관)
제10회 입법고시 합격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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