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왕의 리더십과 온달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입력 : 2018.02.27 16:47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년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씨름무덤 씨름하는 서역인과 고구려인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성한 나라였고, 별다른 시련 없이 줄곧 발전해온 나라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고구려도 처음에는 대단히 작고 약한 나라에서 출발했고, 많은 시련을 겪었던 나라다. 광개토태왕이 고구려를 제국으로 만든 이후 장수태왕(413~491)과 문자명왕(492~519)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와 번영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갖고 있던 많은 장점들을 다른 나라들도 갖게 되고, 국제질서가 변동됨에 따라 고구려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초강대국이라도 쇠약해지기 마련인 것처럼, 고구려도 그러했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리더의 역할이 가장 빛날 때는 위기에 처했을 때다. 고구려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안정과 번영을 가져준 리더는 평원왕이다.

고구려의 위기와 평원왕의 등장
고구려의 위기는 6세기 중반에 찾아왔다. 22대 안장왕(519~531)이 시해되고, 그의 동생 안원왕(531~545) 말년에 왕의 후사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안원왕이 병들어 누워 있는 사이, 자기 소생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두 왕비와 외척, 그들의 지지 세력들이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 궁궐 앞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엄청난 희생이 따른 무력 충돌의 결과 추군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즉위하게 된 양원왕(545~559)은 외척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게다가 551년 내륙 아시아에서 150년 가까이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유연 제국이 새롭게 등장한 돌궐에게 쫓겨 멸망 지경에 이르렀고, 돌궐이 유연의 잔당을 쫓다가 고구려까지 침략해왔다. 백암성과 신성에서 벌어진 돌궐과의 전쟁에서 비록 고구려가 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 틈을 타서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이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이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또한 북중국의 북제와도 관계가 나빠져, 고구려는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557년 2번째 수도였던 환도성에서 간주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귀족들의 내분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승인 혜랑 스님은 나라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며 신라로 투항할 정도로 고구려의 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광개토태왕 시기 고구려군의 강점이던 중장기병은 장창과 쇠노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적 앞에서는 위력이 크게 반감된다. 장창으로 말의 목을 노리고, 강력한 활을 쏴 보내는 쇠뇌로 반격해올 경우 중장기병도 무적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중장기병은 운용하는 비용이 너무 비싸다. 적들이 고구려의 장점을 상쇄할 대응책을 마련하자, 고구려가 주변국을 다 제압하기가 힘겨워진 상황이 된 것이다. 군사적 우위와 중요 동맹국이 사라지고 돌궐, 신라 등이 새로운 적으로 등장하고, 내부 정치도 혼란스러운 어려운 상황에서 평원왕(559~590)이 등장했다.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
평원왕은 후대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임금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평강상호왕으로 불렸다. 그는 바보온달과 결혼한 유명한 평강공주의 아버지였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담력이 크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는 용맹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왕권이 미약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즉위 후, 가장 먼저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에 있는 시조의 사당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시조 추모왕(주몽)은 고구려인들에게 고등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불교가 전파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고구려인들에게 고등신은 나라를 수호하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평원왕은 자신이 천신의 후손임을 재확인하며 왕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평원왕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획득해 반란과 국론 분열 사태를 수습하며, 외적의 침략을 막고 고구려를 튼튼히 지키는 3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남다른 행보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다.

▲북한에서 추정하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 - 평양시 역포구역 소재
온달 이야기

용모가 매우 특이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이 착한 온달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 거리를 왕래하며 밥을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한편 평원왕(평강왕)에게는 울보 공주가 있었다. 그녀가 어려서 너무 많이 울자, 왕이 귀족의 자제와는 결혼시킬 수 없으니 바보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농담을 자주 했었다. 공주가 성장하자 왕은 공주를 귀족인 상부 고씨 집안의 아들과 혼인을 시키려 했다. 그러자 공주는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어찌 말을 바꾸십니까?” 하면서 자신은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우겼다. 그러자 왕은 크게 역정을 냈고, 공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공주는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나서 온달을 찾아가 혼인을 했다.

그녀는 온달이 무예를 연마하도록 도왔고, 마침내 온달은 매년 3월 3일에 열리는 사냥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다. 왕은 온달을 불러 이름을 묻고 이상하게 여겼다. 578년경 북주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해오자, 고구려군은 배산 벌판에서 적과 맞섰다. 이때 온달이 선봉장으로 나가 적 수십여 명을 죽이는 공을 세우자 사기가 오른 고구려군은 후주의 군대를 크게 격파할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왕은 온달이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하고 그가 자신의사위라고 신하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공주를 불러 용서하고, 온달에게도 높은 벼슬을 주었다. 온달은 왕의 총애를 받아 위엄과 권세가 날로 높아졌다. 온달은 처남인 영양왕 즉위 초까지 활동하다 아단성 전투에서 죽었다.

온달을 등용한 평원왕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소 윤색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에서 가장 의아스러운 것은 평원왕이 어찌 시정거리에서 놀림이나 받던 바보온달을 알고 있었을까? 또 만약 조선시대라면, 공주가 거지와 결혼하겠다고 궁궐을 나갔다면, 당장 군사를 보내 거지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까? 만약 평원왕이 마음만 먹었다면, 도성 근처에 사는 온달과 공주를 찾기란 쉬웠을 것이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일찍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원왕은 공주의 선택을 묵인했다. 그리고 평민이 온달이 능력을 발휘해 공을 세우자, 사위로 인정해주었다. 조선시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실제 이야기는 온달이 먼저 장군으로 출세한 후,왕의 사위가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괴상한 외모를 가진 온달은 서역에서 왔거나, 그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7세기에 번영했던 소그드족의 나라 강국(康國-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왕의 성씨가 온(溫)씨이며, 현재 투바공화국(러시아 내 자치공화국)에는 성씨가 온다르(ondar)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고구려는 서역과 일찍부터 많은 교류가 있
었다. 고분벽화에도 서역인이 자주 등장하는 만큼, 이들이 고구려에서 출세하는 일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온달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평강공주의 도움도 물론 컸지만, 평원왕의 결단이 더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하더라도, 신분사회에서 하층민인 온달이 왕의 사위로 인정받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평원왕도 온달이 사냥대회에서 선발된 즉시 사위로 인정하지는 못하고, 북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후에야 비로소 사위로 인정했다.

평원왕이 능력이 있지만 배경이 약한 온달을 왕의 사위로 삼은 것은, 그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축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원왕 시기에는 고구려 귀족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이 많다. 온달과 더불어 대표적인 인물이 을지문덕이다.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전해지지 않는데, 612년 살수대첩의 영웅이 될 때 나이가 40이 넘었다고 본다면, 그는 평원왕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라
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개소문의 연씨 가문도 이때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안성 을밀대 - 평원왕 때 완성된 고구려의 장안성의 아름다운 풍경
고구려의 번영을 가져온 평원왕

평원왕은 578년 북중국의 후주, 583년 유목제국인 돌궐과의 전쟁에서 거듭 승리했다. 특히 거란 지배를 둘러싸고 벌어진 돌궐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요서 북부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돌궐을 물리쳤던 자신감이 그의 아들인 영양왕 시기에 수나라와의 4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던 원동력이 된다. 평원왕은 이때 전쟁에서 활약한 무장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구축하고, 전쟁 승리를 배경으로 왕권을 다시금 강화했다.

귀족인 상부 고씨 가문과의 혼약을 파기하고 온달을 사위로 받아들일 만큼, 귀족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평원왕이 외적을 물리치고 내부 단속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63년 여름에 큰 가뭄이 생기자 평원왕은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백성들의 어버이 된 자가 홀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내게 올리는 식사를 크게 줄이도록 하라. 나 역시 백성들과 고통을 나누겠노라. 이렇게 비가 오지 않으니 내가 산천에 나아가 천신에게 기도하여 가뭄이 멈추기를 기도해야겠다.”고 하였다.

가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걱정하며 왕이 솔선수범해서 식량을 절약했던 일은 삼국시대 왕들 가운데 평원왕이 유일하다. 평원왕 시기에 중요한 국가적 사업은 장안성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둘레 23㎞인 장안성은 궁성이 있는 내성과, 관청과 귀족의 거주지인 중성, 그리고 일반인이 사는 외성, 내성을 방어하는 북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안성은 오늘날 평양시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장안성은 돌궐과의 전쟁을 치룬 직후인 552년에 시작되어 35년이 지난 586년에 완성되었고, 평원왕은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다. 장안성은 훗날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 대군을 격퇴하는데 큰 힘이 된다.

하지만 평원왕은 이 성을 건설할 때 절대 서둘지 않았다. 궁궐 공사를 하다가도 메뚜기떼 피해와 가뭄이 심해지면 즉시공사를 중단했다. 성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아야 하고 농사일이 더 소중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했을 때에는 평원왕이 직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긴급하지 않은 일을 줄이고, 관리들을 여러 고을에 내려 보내 농사와 길쌈을 장려하는 등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평원왕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혔다.

온달 이야기가 후세에 전하는 이유
고구려 초기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좌식자라 불리는 전문 전투 집단이 나서서 전쟁을 담당했다. 하지만 국가 규모와,전쟁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갖게 되었다. 평민들도 경당에서 활쏘기와 말 타기 등을 배우며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평민들이 전쟁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게 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당근책을 제시해거나 백성들의 삶을 국가가 확실히 보살펴 준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만 한다. 평원왕이 백성을 돌보는 일에 적극 나선 것은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원왕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온달처럼 열심히 무예를 연마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면 왕의 사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온달 이야기가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국가 차원에서 그의 성공담을 적극 홍보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도 온달 이야기를 주제로 만담이 펼쳐지거나 공연이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온달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흙수저의 성공담이다. 고구려 초기에 사람들이 선망하는 스타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주몽(朱蒙)이었다. 온달은 주몽처럼 활을 잘 쏘아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하고, 이어서 전쟁에서 공을 세워 큰 출세까지 하게 되었으니, 일반 백성들이 본받고 싶은 성공모델, 스타였던 것이다.

백성을 움직인 평원왕의 리더십
고구려가 돌궐을 물리치고, 이어서 평원왕 사후 영양왕 시기에 있었던 수나라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온달처럼 무예 연마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력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 조직이 자신을 보살펴준다는 신뢰가 고구려인의 전투의지를 드높였던 것이다. 평원왕은 32년간 재위하면서 흔들렸던 고구려를 다시금 강국으로 만들었다. 당나라 두우가 쓴 《통전》에는 고구려가 수나라(581~618) 시기에 이르러 나라가 점점 커져 동서 6천리가 된다고 했다. 《위서》에는 5세기 고구려가 동서 2천리였다고 했다. 100~200년이 지난 후 정확히 몇 배나 영토가 넓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평원왕과 영양왕(590~618)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와 국력이 크게 신장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평원왕 시기에는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등 화려한 고분벽화가 만들어졌다. 무덤 천장에 천자의 상징인 황룡이 그려지고, 생동감 넘치는 사신도와 다양한 신들이 그려진 고분벽화가 등장한 것은 고구려의 문화적 자신감이 최고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위기를 극복하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평원왕의 성공은 이처럼 백성들에게 북한에서 추정하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 - 평양시 역포구역 소재 희망을 주고, 신뢰를 얻음으로써 이룩된 것이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을 저술하여 고구려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보여준 생활사 연구로,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를 화두로 삼아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 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고구려, 수, 당, 북방제국의 대립관계’ 등의 논문과 <고구려의 발견>,<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조선이 가지 않은 길> 등을 저술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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